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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경영/독서 학습

[김성민의 독서학습] 과학혁명의 구조 - 토마스 쿤

[김성민의 독서학습 - 과학혁명의 구조] 

패러다임에 대한 오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때,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박 상태의 낙하 현상을 보았고

갈릴레오는 진자를 보았다. p.176


  흔히 관점이나 프레임, 생각의 패턴등과 혼용하여 사용되는 '패러다임' 이라는 말을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만든 책이 바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다. 많은 경영서나 자기계발서에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고정관념을 제거하고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보라 라는 말을 하려고 할 때 그저 '패러다임을 바꿔 생각해봐' 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봤고 나도 그 말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토마스 쿤이 이 책의 후반부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1차 도서를 읽지 않고 가공되고 편집된 2차 3차 도서를 읽는 독서문화의 문제일 것이다. 모두가 원전을 읽고 초기논문을 통해 그 과정과 진의를 파악해야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날것그대로의 지식을 통해 누군가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나와 같은 강사나 교수, 교사에게는 다른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원전을 통해 단어의 참뜻과 활용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는 내가 오해한 것 중 대표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꿔봐' 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우리가 이런 말을 쓸때에는 그것이 '고정관념을 바꿔봐', '관점을 바꿔봐', '생각을 바꿔봐' 보다는 좀더 권위가 실린 유식한 표현이어서 그렇게 말하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패러다임을 바꿔봐' 라는 말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왜 그런지 책의 내용을 통해 말해보겠다. 

쿤은 과학, 그중에 특히 물리학 천문학 분야를 가지고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특정 학문 분야에만 국한되진 않는다고 보인다. 생물학, 경영학, 경제학, 심지어 예술과 정치 등 인간의 삶 모든 구석구석 어디에도 이런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단 한 사회와 조직이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를 '패러다임'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이 패러다임을 기반에 깔고 세워진 과학이 정상과학(normal science) 라고 표현하는데, 지구주변을 태양과 달과 별이 돈다라고 하는 천동설의 패러다임내에서 다양한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이 발표가 되었다면 그것들을 정상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쿤이 짚어낸 아주 재미난 부분이 있는데  과학자들은 절대 새로운 아이디어와 발견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자 개인이나 과학자 집단이 하는 것은 정상과학내에서 그것을 지지하고 증명하는 설명들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한다. 지구주변을 별들이 돌고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날 별들 중 일부가 거꾸로 도는 것을 발견했다면 지동설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천동설의 입장에서 별들이 거꾸로 가는 운동의 수식을 정교하게 다시 내놓는 것을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때, 별들이 거꾸로 움직이는 것을 관찰함 같이 정상과학 내에서 기존 방식으로 잘 설명이 안되는 이상(異常)이 발생하게 되고 어떻게든 기존 패러다임으로 이상(異常)을 설명하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만든 설명이 어느정도까지는 상당히 잘 맞아 떨어지는데,  한참을 이어가다 그 패턴을 깨는 아이디어가 등장한다고 한다.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p.104


그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어느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라 해당 분야에는 아마추어인듯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책에서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사람이 화학에서 원자를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진 '돌턴' 이다. 그에 대한 다음의 소개글을 읽어보자. 


그런 연구의 최후 단계에 이르기까지, 돌턴은 화학자도 아니었고 화학자에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물에 의한 기체의 흡수와 대기에 의한 수분의 흡수라는 물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던 기상학자였다. p.190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은 기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한 정상과학에서 인정받은 사람일 것이고 그 사람은 기존 패러다임이 구축해놓은 시스템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새 패러다임을 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것을 정리해놓은 것이 다음에 나오는 패러다임 변화를 이끄는 사람의 2가지 특징이다. 


패러다임 변화를 이끄는 사람의 2가지 특징  p.207


1. 위기를 조장하는 문제들에 관심이 강력히 집중되어 있다.


2. 위기가 닥친 분야에 극히 생소한 젊은 학자여서 옛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된 세계관과 법칙들에 다소 약하게 얽매여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위기' 라는 단어라고 본다.  '과학혁명' 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위기'가 있어야 한다고 쿤은 보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코페르니쿠스 이전 수백년전에도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 천동설 이론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세상의 움직임을 잘 설명할 수 있었기에, 즉 그 패러다임 내에서의 '위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때 나온 새 이론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를 못했고 역사의 한켠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말했을때 그것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것은 그동안의 '위기'를 제대로 해소해주는 이론이라는 공감대를 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나는 '패러다임을 바꿔봐' 라는 말이 큰 오해의 표현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도 바로 '위기' 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변화하지 않는 사람, 조직, 친구에게 조언한다고 하며 '패러다임을 바꿔봐' 라는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바꾸라고 해서 바꿔지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이 전환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 시스템내에서의 '위기'를 발견하는 것이 먼저이다. 아무리 술 담배 끊고 운동 시작하셔야 한다고 해도 안하던 사람이 건강검진때 의사로부터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행동에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조직내의 변화에도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그럴듯한 껍데기 말이 아니라 진정 위기가 어떠한지에 대해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내에 있는 사람은 그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단어와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회전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돌았다고 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단순히 틀렸거나 또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구’라는 것으로 의미했던 것에는 이미 고정된 위치라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혁신은 단순히 지구를 움직이게 한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다. 필연적으로 ‘지구’와 ‘운동’의 의미를 둘 다 바꾸어 버렸다. p.214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사람들은 '지구가 돈다' 라고 했을 때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리없는 아우성', '차디찬 불덩어리', '세아들키우는 조용한 집' 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모순형용의 표현을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변화를 위한 두번째 갖춰야 할 것은 '공감' 이다. 새로운 환경과 상황, 혹은 사람과의 만남과 조우에서 그 대상을 진정 이해하려고 하는 공감의 능력이 있어야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있는 사람들은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세상을 살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때,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박 상태의 낙하 현상을 보았고 갈릴레오는 진자를 보았다. p.176


유물론자, 무신론자가 사는 세상에는 신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가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신이란 늘상 한결같이 있는 존재이다. 둘은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다 해도 말이 될 정도로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에 자신의 패러다임을 절대화 하는 한 서로를 이해하거나 대화를 할 수는 없다.  함께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의 패러다임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 좋은 소통 문화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쿤의 과학혁명이라는 것도 다양한 방면에서 비판받는 이론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는 엄연히 쿤이 이야기한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든듯 하다. 그래서 다소 번역이나 글이 난해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한번쯤 읽어보길 추천하는 바이다.  아마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에 대한 오해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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