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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경영/독서 학습

[김성민의 독서학습] 서양미술사 - E.H.곰브리치 (세번째)

[김성민의 독서학습 - 서양미술사 ③]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p.164


 역사를 볼 때, 세상을 볼 때,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프레임으로 바라보기가 쉽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라는 내용을 주입식으로 외우다 보면 그것이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에는 어떻게 책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중세 암흑기' 라는 말은 고유명사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되었다.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은 예술, 문화 등에 있어서 뭔지 모르게 낙후되었고 발전이 없었던 시대로 바라보는 관점이 그것이었다. 빨간 색안경을 끼니 세상이 시뻘겋게 보인다고, 중세에 대한 그런 프레임으로 보니 중세의 미술들은 중세 이전과 이후의 그림과 비교해서 뭔가 못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TV 뉴스에 나온거야' 라고 하면 반박이 불가한 진리가 선포된 것마냥 그런 생각에 어떤 다른 관점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적어도 내게를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생각에 잡혀 있던 내게 곰브리치의 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집트 미술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방식으로 대상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그림을 그려내었고, 그리스는 근육과 힘줄까지 사실적으로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세는 그 나름의 가치와 그려낸 목적 및 방향성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그들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시켜 주고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략)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 라고 했다.  p.135


 위 표현대로 보자면 중세의 그림에 있어서 그 그림이 얼마나 사실과 똑같이 그려졌는가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역할을 하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중요도에 따라 얼마든지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상을 배치하는 것도 배경이라는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의미전달의 손실이 없다면 아무곳이라도 넣을 수 있었던 것이 이 시대의 미술이었다.  후에 르네상스로 접어들며.. 그림이 실제 공간상의 위치와 사람들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자유분방한 배치와 의미부여가 사라졌음을 곰브리치는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형상 자체를 금기시하는 문화에 있던 이슬람은 기하학 적인 도형을 통해 놀랄만큼 화려한 형태의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p.144


  아름다운 기타선율로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하나의 음을 연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이국적이며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트레몰러 주법을 사용한다. 음악이 표현하듯 위 사진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은 연속된 문양의 반복으로 몹시 매력적이며 화려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목적에 따라 동양이나 서양이 하지 않던 미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동양으로 가보아도 기존의 시각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을 그림에서 발견하게 된다. 


동양의 종교는 올바른 명상, 즉 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명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에 대해 그것을 마음 속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동일한 신성한 진리를 여러 시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하여 그 본체를 상실함이 없이 모든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동양인들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정신적 훈련으로 서양 사람들이 육체적인 운동이나 스포츠에 부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중략) 신앙심이 깊은 미술가들은 어떤 특수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깊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경의 염(念)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p.150



 그래서였을까? 위에 올려놓은 마윈의 '대월도' 라는 작품을 가만히 한참을 들여다 보면 명상을 하는 듯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뭔지 모를 정신수양이 된다는 기분이 든다. 


지난번 글을 올리니 페친 한명이 '미술에는 정답이 없는데' 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정말 깊이 공감하는 말이다. 어쩌면 곰브리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이 그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비단 미술뿐이겠는가? 세상에 정답이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규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때 우리는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상대의 관점에서.. 역사흐름의 시간적 관점에서.. 문화적 차이라는 시야속에서 새롭게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좀더 성숙한 '눈'을 가지고 세상을 알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김성민의 북리지 - 함께 성장하는 책 리더십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