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의 독서경영 -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p.169
어려서 잠시 바둑에 흥미를 지녔던 시기가 있었다. 책 제목이 '바둑 첫걸음'이었던가, 바둑의 가장 기초적인 룰을 알려주고 퀴즈문제를 풀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검은색돌과 흰색돌을 이리저리 놓아두고 백이 살려면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수십개가 나와있었다. 그것은 수학문제를 풀듯 규칙을 가지고 고민하면 풀리는 문제들이었다.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방법을 '사활(死活)'이라고 했는데 죽음과 삶을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최초의 시기가 바로 그때 초등학교 4,5학년때였던것 같다. 그러다가, 한번은 동네 주산학원 건물 3층에 있던 기원에 용기를 내어 들어가봤는데, 자욱한 담배연기의 캐캐한 냄새와 우중충한 분위기에 들어가자마자 걸음을 돌려 나왔던 기억이 있다.
오랫동안 바둑이라는 것에 대해 잊고 지내다가 지난달에 있던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해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나서의 소감은 한마디로 조훈현 9단의 바둑인생 자서전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승부의 세계를 세상 살이에 확장시켜 인생을 살아가는 그 자신의 철학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등떠밀려 억지로 하게 된 내기바둑 한번에 일본인 스승으로 부터 내처짐을 받고 귀국해야할 뻔 했던 이야기,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속에서 들러리 역할을 했던 한국바둑을 세계의 중심에 두게 된 잉창치배 대국 이야기, 자신의 집에서 키운 제자 이창호 9단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타이틀을 다 빼앗기고 나서의 마음, 드라마 올인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차민수와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시절 이야기 등. 바둑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자기계발서적인 뭉클함을 던져준다. 이야기하는 주제로는 교육문제, 성품, 성공의 투지, 집념, 자기성찰, 리더십, 급기야 건강관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최고의 위치에 이르렀고, 자신이 키운 제자에게 패배를 당하는 치욕을 겪기도 하였으며 다시 재기 도모하는 과정이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19x19의 작은 바둑판위에 각자의 인생을 담은 프로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너무 안일하게 혹은 나약하게 살고 있진 않는지 뒤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불편한 마음도 생기는 책이었다. 바둑이라는 스포츠에서 일평생 승부를 겨루며 살아오셔서 그럴것이다. 그가 하는 인생의 이야기는 바둑의 확장판이었다. 인생도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싸워야만 정상을 거머질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그려놓았다. 그것이 현대 사회를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처세술로 다가올 수도 있고, 직장인에게 성공비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이 정글이 아니길 바란다. 패배자는 설욕을 위해 복수의 칼을 갈며 복기를 해가는 그런 사회, 우승자만이 상금을 거머쥐는 그런 사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는가? 얼마전 SNS 에서 우연히 보았던 사진속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항상 최선을 다하라구요? 그러면 지쳐서 못삽니다". 물론 목표를 가지고 현실의 어려움을 인내하며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1등만의 세상이 당연한 것으로 정해놓은 신자유주의의 노랫가락에 광대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거부하고 싶다. 그래서 인지 조훈현 9단의 이야기속에 바둑판의 승부논리가 인생으로 확대되는 것 같아 불편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조훈현 9단의 인생이야기를 통해서 여러 교훈들을 얻을 수 있기에 무기력한 삶에 자극을 받고자 하는 분에게는 적극 추천한다.
<책 속의 명언>
- 돌이켜 볼 때 나는 천재도 아니었고 바둑을 잘 알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생각이 자유분방했던 것이다. p.27
; 다섯살때 부터 아버지 바둑에 훈수를 두면서 시작한 바둑이 아홉살에는 최연소 프로 바둑기사가 될 정도로 성장한 것을 보고 주변 사람은 천재라고 한다. 이에 조훈현 9단은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바둑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수를 두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겸손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창의성 측면에서 핵심을 간파하고 있는 말이다. 흔히 아이들이 특이한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을 만들면 어른들은 정말 창의적이라고 아이들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고정관념이 적어 자유분방할 뿐 창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창의성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나는 것은 진짜 문제를 만났을 때이다. 조훈현 9단은 일본으로 건너가 정석을 배운 일본 원생들에게 무참하게 깨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기본기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일단 기본기가 다져지면, 그때부터는 다시 망아지가 되어야 한다'
기본기가 없어 고삐풀린 망아지였다면, 기본기를 갖춰야 하고 그리고 나면 다시 망아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높은 창의성이 요구되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야에 대한 기본지식을 섭렵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해당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면 배운 지식의 경계에다 담을 쌓아놓고 그 안에서만 생각하려고 한다. 진정한 창의성은 그 담을 넘어 경계를 오가는 자유분방함에서 나온다. -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조금이라도 공식에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혼자서 실컷 헤매본 사람은 공식 따위는 몰라도 된다.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p.36
;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강남 대치동이 생각났다. 문제를 푸는 탁월한 방법들을 배우고 이 배움을 사용해서 시험에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게 현재 우리의 교육이다.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문제가 공식을 잘 외운 사람들이 풀 수 있는 정도에 맞춰져 있어서 그런것인가? 아니면 대치동에서는 스스로 생각해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줘서 그런것인가? 어쩌면 앞에 나온 '기본기'와 같이 다양한 공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더 어려운 문제도 풀어낼 생각의 폭도 넓혀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고액과외를 통해 사교육을 열심히 한 사람이 더 나은 성적을 낸다는 가슴아픈 결론이 난다. 과연 혼자서 실컷 헤매보며 스스로 익힌 사람이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바뀌어야 할 것인가?
김성민의 북리지 - 함께 성장하는 책 리더십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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