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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경영/독서 휴식

[김성민의 독서휴식]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김성민의 독서휴식 -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p.403  

(이사를 하던 와타나베에게 나가사와가 마지막으로 해준 말)



  하루키가 쓴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나서 그 사람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겠노라고 벼르다가 반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팬 층도 상당히 두터운 하루키의 소설은 무척 유명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내가 아는 바가 없어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했었다. 각각 서로다른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은 것으로 '노르웨이의 숲'과 '상실의 시대' 중 뭘 읽을까 고민을 했었으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전혀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은 모두 같은 내용의 동일한 책이었다. 왜 이런일이 벌어졌는가 싶어 찾아보니 하루키의 일본 원작의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 이었는데 한국에 '노르웨이의 숲'으로 번역되어 처음 나왔을 때 안팔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출판사에서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놓았고 그것이 국내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면서 하루키의 이 책은 국내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쨋든 나는 왠지 '노르웨이의 숲'이 뭔가 이국적이며 목가적인 장면이 떠오르며 끌리는게 있어서 이 책을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노르웨이의 숲'에는 노르웨이가 나오지 않는다.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속에서 주인공은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다. 책 제목과 동일한 이 곡에 어떤 사연이 있기에 주인공은 저렇게 힘들어하는가? 그런 의문을 남긴채 독자를 20여년전의 어느날의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비틀즈의 그 음악을 궁금해서 찾아들어보았다. 가사를 보니 남자가 여자의 집에 찾아가서 하루밤을 보내고 다음날 혼자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스토리였다. 요즘이야 원나잇 엔조이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사회분위기이지만 당시 80년대를 염두에 둔다면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들었다. 소설의 전반부까지 읽었을 때는 노래와 같은 자유연애를 그린 내용인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기숙사에서 사귀게 된 2살연상 나가사와와 함께 밤거리를 떠돌며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가볍게 하루를 보내는 장면은 비틀즈의 노래 가사와 자연스럽게 매칭이 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읽어가다보니 소설은 그보다 더 애잔한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상실을 경험하고 고독에 쌓여있는 대학생 혹은 청년들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 두 번째 주에 나는 대학교육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대학 4년을 지겨움을 견뎌 내는 훈련 기간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p.89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p.96 (미도리와의 첫만남에서 와타나베가 한 말)

무한히 이어지는 수렁뿐이었다. 오른발을 내딛고 왼발을 들어올리고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다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따름이었다. p.396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때 자신의 절친인 기즈키의 자살에 충격을 얻고, 그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와 애매한 관계에 처하며 갈등의 시간을 보낸다. 자신에게 던져진 삶의 고뇌에 주어진 삶을 그저 훈련정도로 생각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모습. 그것이 20대를 살아가는 자의 방황의 현주소 같았다. 이게 나의 눈길을 잡아 끈 이유는 나의 대학생시절을 떠올려보게 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무엇인가 허탈한 마음에 빠져 날마다의 수렁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시간을 보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내주시는 과제를 영혼없는 몸짓으로 꾸역꾸역 해대며, 강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은 했지만 열정은 모두 녹아내린채 그저 의무를 감내하며 하고 있다는 그런 태도 말이다. 어느날 나를 아끼는 선배누나가 해준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넌 어딘가 촉이 빠져 있는 것 같아'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소설속의 와타나베를 보며 딱 내가 그런 상태였다는 사실에 큰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와타나베는 무덤덤한 매력을 전해준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것이다. 흔히 요즘 말하는 '대인배'와 같은 면모도 보인다.  데이트인줄 알고 가볍게 따라 나섰다가 병상에 누워 있는 미도리의 아빠를 자신이 두어시간을 돌보게 되는데 마지막 헤어질 때 미도리의 고맙다는 말에 이와 같은 말로 답을 한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뭘.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다음 주에도 올게. 너희 아버지, 또 만나고 싶고.”  p.332


   누워서 몸도 못가두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의 침을 닦아주고 소변을 받고 밥을 먹여주고 등등의 일이 그에게는 크게 거리낌이 있게 보이지 않았다. 작가가 너무 멋지게 그려놓았나 싶다가도 와타나베의 평소 행동을 보면 충분히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원대한 목표라는 것 때문에 현재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않는다. 물론 목표를 위해 인내하며 정진하는 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와타나베를 통해 느꼈던 것은 날마다 마주치는 대상에게 어떻게 대하느냐가 바로 나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에서였다. 주변에 나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이야기 상대를 해주어야 할 때에도, 혹은 사회적인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해 참여를 해야할 때에도 나는 시간 효율을 따지며 주저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렁의 시간을 보내지만 자신의 현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와타나베에 매력을 느꼇던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위에 나와 있는 관계표를 보다가 남자가 겪는 3가지 사랑을 그린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번째 사랑은 고등학교때의 풋사랑이었다. 풋사랑의 그녀는 500페이지 달하는 이 책의 분량에서 한단락도 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앞부분 몇줄 나오고 만 그녀가 와타나베의 방황 여행 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부가 가 버린 다음, 문득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잤던 여자 친구가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생각하며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상처 입을지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제대로 더올리지도 않았다. 정말 상냥한 여자애였다. 그렇지만 그즈음 나는 그런 상냥함을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의 되새겨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뭘 하며 지낼까, 그리고 나를 용서했을까.  p.456


  처음 하는 사랑은 풋사랑이다. 미숙하기에 쉽게 상처주고 상처받는 그런 사랑.. 누구나 그런 사랑은 해보지 않았을까? 나 역시 첫사랑의 그녀에게는 나쁜남자, 아니 못된남자 였을 거다. 


 두번째 사랑은 죽은 절친 기즈키의 여자친구인 나오코와의 사랑. 어쩌면 이런걸 짝사랑 혹은 일방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오코는 20살을 맞는 생일에 처음으로 와타나베와 관계를 맺어 와타나베에게 어떤 강렬한 책임감을 전해주지만 그후 갑자기 사라져 요양원에 들어가 버린다. 마치 군대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듯 요양원에 들어간 나오코를 기다리며 와타나베는 하염없이 그리움의 편지를 쓴다. 일방적이라고 하기에는 나오코도 와타나베에게 아얘 마음이 없진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나오코가 부탁한 2가지 말 ..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라는 것을 듣고 와타나베는 '나를 사랑하지 조차 않았던 것' 임을 알게 된다.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 같은 사랑,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나에게 다가오지 않고 끝내 그녀는 영영 떠나가버리고 만다. 이렇게 말하면 신파 같지만 나도 역시 그런 사랑이 있었다. 함께 민속촌 데이트를 하고 난 그날 밤 더이상 만나지 말자는 문자메시지 한마디로 관계를 정리해버렸던 그녀, 그후 와타나베처럼 방황의 여행을 떠났던 기억도 생생하다. 


 세번째 사랑은 이루어지는 사랑, 미도리와의 사랑이다. 정말 우연스럽게 마주쳤고 친구와 같이 거리낌없는 대화를 나누는 관계였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인식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사랑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레이코를 배웅해주고 나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통해 어느정도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같이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짐을 아얘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짐이 있는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냐가 아닐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애잔하고 쓸쓸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의 에너지를 느끼며 내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되었다. 어쩌면 레이코가 편지로 해준 이와 같은 말이 우리 삶에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주 그래.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가는거. 그러면 큰일이야.”  p.201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어딘가 반드시 실마리가 있을 거예요.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멈춰 서서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거예요. p.430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서 하루키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난다.  머리 좋은 사람은 후지산을 근처에서 대략 보기만 해도 몇줄로 그것을 표현해낸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 직접 발로 몇번이고 올라가봐야 했다 는 말. 소설은 그런 것 같다. 한마디로 압축하려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그 여정을 함께 하고 나면 나 역시 와타나베가 겪은 상실을 경험케 되고 그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지식을 얻으며, 감성이 솟아오르게 된다. 그런면에서 소설 읽기를 조금씩 시작해볼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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