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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독서휴식] 박사가 사랑한 수식 - 오가와 요코

[김성민의 독서휴식 - 박사가 사랑한 수식]


"제일 먼저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증명은 아름답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p.26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과 충돌한 사고로 기억을 80분 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수학 교수. 그의 집에 열번째 가정부가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마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메멘토가 아내를 죽인 범인에 대한 복수를 담고 있고 10분이라는 짧은 기억에 의해 장면 장면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그와는 다르게 무척 잔잔하면서도 따뜻하다. 


 어제까지 내가 최고의 부와 영광을 다 얻고, 아무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했더라도 오늘 그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면 나는 행복할까? 때론 아얘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에 몸서리칠 경우도 있겠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다는 것은 개인의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아무리 힘든 경험을 겪었어도, 10여년이 지나 뒤돌아보면서 그 당시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게 인간이지 않은가. 군대 전역후 부대가 있는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제대 병장들이 훗날 모이기만 하면 그토록 군 생활 이야기를 미담과 영웅담처럼 해대는 모습을 봐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어제의 기억이 다 잊혀져버린다면 우리의 일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계획해놓은 것, 내가 미래를 꿈꿔왔던 것, 내가 그동안 고민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건 아닐까. 소설 속에도 자신이 해낸 결과물을 모두 버려버리라는 장면은 두세마디 대화로만 이루어져있지만 당사자가 가졌을 고뇌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버리다니요, 당치도 않아요.”

“어째서지?”

“이거 다 박사님이 하신 거잖아요. 박사님이 전부 혼자서 말이에요.”. p.215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옷자락에 붙어 있는 '나의 기억은 80분밖에 되지 않는다' 라는 메모를 읽는 박사의 심경은 어떨가? 만약 그 사실에 직면하여 절망과 체념의 선택을 하였다면 박사의 일상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소설속의 박사는 매우 강인한 사람이다. 서재에 틀어박혀 숫자의 아름다움을 탐색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수학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 않았는가. 저널 오브 매스매틱스 라는 잡지에 나오는 수학난제를 풀어 응모하는 것은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문제를 만든 사람은 답을 알고 있지. 반드시 답이 있다고 보장된 문제를 푸는 것은, 가이드를 따라 저기 보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p.51


 어쩌면 박사는 자신의 80분밖에 안되는 기억으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네 삶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인생'을 찾아 그것을 풀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았는가. 몇살에 대학에 들어가고 몇살에는 결혼을 하고, 몇살에는 집평수를 늘리고 하는 등의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부수적인 심심풀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때론 내가 '자신의 이유'로 선택한 길이 벼랑길이나 골짜기일지라도 그 삶의 선택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주인공 가정부와 전직 수학교수였던 박사, 그리고 가정부의 열살 아들. 아름답게만 이어질 것 같았던 이들의 일상은 갑작스럽게 위기가 찾아오고 그것을 화해시키며 해결한 것이 하나의 수식이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장면이다. 


eπ + 1 = 0
나는 다시 한 번 박사의 메모를 쳐다보았다. 
한없이 순환하는 수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수가 간결한 궤적을 그리며 한 점에 착지한다. 
어디에도 원은 없는데 하늘에서 π가 e 곁으로 내려와 수줍음 많은 i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서로 몸을 마주 기대고 숨죽이고 있는데, 한 인간이 1을 더하는 순간 세계가 전환된다. 
모든 것이 0으로 규합된다.  p.180


 이 수식은 쫓겨났던 가정부를 다시 박사의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맺어준 매우 큰 의미가 담긴 수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설명을 읽었어도 나는 그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이해가 안간다. 특히, 이 수식을 보자마자 박사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미망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의 이유가 무엇때문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소설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박사와 미망인 둘만이 가지고 있는 그 수식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거니 싶다. 만약 그런게 아니라면 그 수식자체의 설명을 미망인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그야 어쨋든, 하나의 간략한 수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오일러의 정리가 무언가 모를 인문학적 감성을 뿜어내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신기하였다. 


이 책에는 수학이 나오긴 하지만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다. 소설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도 괜찮을 법한 책이라 생각된다. 오가와 요코는 이 책을 통해서 요미우리 문학상의 소설상을 받았다고 한다. 참으로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이 가을에 따스함을 느껴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권한다.



김성민의 북리지 - 함께 성장하는 책 리더십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