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의 독서경영 - 오래된 미래]
"라다크에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라는 말이 있어요.” p.153
논밭이 내다보이고 차량이 많지 않은 국도변을 따라 운전할 때면 가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며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를 가사로 하고 있는 이 노래의 후렴부인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를 부를때 즈음에는 그 옛날 어린시절의 추억속으로 돌아간다.
'맹골' 이라고 하는 촌스러운 이름의 시골 마을회관 앞은 언제나 동네 아이들의 놀이로 북적였다. 말뚝박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정신없이 놀다보면 어느덧 해가 기운다. 그 시간에 마을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저녁 노을이 마을을 감쌓기 때문이다. 붉은 노을이 지면 어김없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하얀색의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러면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끌려 가듯 우리는 밥냄새따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나의 어린시절 시골마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추억의 장면이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된다' 라는 시골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초등학교 3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왔지만 어린시절 시골 삶의 경험은 내 깊은 정서속에 가득 담겨있는 것 같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4,50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라다크에 대해 쓴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깊숙이 공감이 일었던 것은 이런 나의 어린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스웨덴 출신 저자가 언어학 학위논문을 위해 라다크를 처음 방문하여 그곳의 때묻지 않은 전통의 삶 그자체를 경험하며 쓴 부분이다. 2부는 16년이라는 시간을 라다크에서 생활하며 그곳의 개발과 서구화에 의해 아름다왔던 가치들이 훼손되는 모습에 마음아파하며 쓴 부분. 3부에서는 사실과 개인적 감상을 넘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국제단체를 조직하고 라다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겪었던 일과 생각들로 구성된다.
1부에서 묘사된 자급자족의 경제, 환경, 그들의 문화, 삶의 태도 등을 읽는 내내 이것이 내 어린시절 '맹골'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다크 이야기야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이곳에서는 내 어린시절 시골이야기를 잠시 해보도록 하겠다. 내가 살던 시골집은 대문이 없었다. 그 마을에 다른 집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처럼 아파트 1층 현관에서부터 이중 삼중으로 문을 켜켜히 걸어잠그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익숙치 않은 모습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살림을 빤히 알고 있었는데, 흔히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 다아는 사이' 라는게 그냥 비유적 표현만이 아니었다. 마을에 문제가 있을 때는 함께 어른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처리를 했다. 내가 살던 바로 위쪽 언덕집에는 '거지네'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 아이도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경제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차별이나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에는 공동의 우물도 있었고, 각집에는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가 있어서 물이 필요하면 마중물을 부어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콸콸 물이 쏟아져 나왔다. 수도계량기가 돌아가거나 요금고지서가 날라와 입금을 해야할일이 없었던 것이다. 화장실은 당연히 푸세식이었는데, 똥이 어느정도 차면 할머니가 그것을 퍼다가 밭에 뿌리곤 했다. 그게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을 그 당시에는 전혀 하지 못했었다. 매주마다 쏟아지는 스티로폼과 비닐, 박스 등의 분리수거 문제가 그때는 없었고, 간혹 어디선가 생기는 공병은 마루밑에 한곳에 쌓여있다가 가끔씩 엿장수가 마을에 찾아왔을때는 몰래 가져가서 엿바꿔먹으면 되는 정도였다. 라다크와 완전 같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도 자급자족의 경제체계, 서로가 함께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마을 공동체가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던 그곳이 국가경제개발이 되어가며 젊은 층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이제 찾아가보면 나이든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것은 비단 내가 있던 시골마을만 그런건 아닐 것이다. 추석과 설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몇시간을 보내다보면 자연스럽게 나 말고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왔음을 알게 된다. 이는 2부에서 이야기하는 라다크가 발전과 진보라는 서구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그 고유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과 닮아 있었다. 작년인가 제작년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짧은 만화 한편이 기억난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이민생활을 하다가 몇십년만에 돌아온 사람이 보게된 한국의 이야기였다. 1인당 소득이 3만불을 넘었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모두 화려하며, 밤이나 주말에도 언제든 전화 한통이면 집으로 가져다주는 배달 문화와 풍성한 먹거리, 여름 겨울휴가와 방학철 혹은 연휴만 되면 세계여행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항, 2년마다 새롭게 바꾸는 최신 스마트폰을 어른들은 물론 초등학생들까지 들고다니는 그런 풍요로운 나라가 된 한국을 보면서 놀라와 한다. 그런데 그가 만난 친구들은 저마다 사는게 힘들어 죽을 맛이라고 하는데, 이토록 잘 사는 나라에서 헬조선이니 뭐니 하며 불평에 빠져 있는 그 친구들이 너무 이해가 안가하며 만화는 끝을 맺는다. 이 만화는 한국이라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에서 불평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던지고자 하는 의도였던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만화를 보면서 나는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왠지 이건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그 만화의 화자가 이야기한게 틀린 말도 아니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오래된 미래' 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 내 마음의 불편함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멀리서 힘든 이민 생활의 끝에 방문했던 만화의 주인공은 한국 사회를 오직 경제적 발전의 모습으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 않나 싶다.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 먹을 것이 풍요로워졌는데 무슨 불평이나 하고 있느냐는 논리이다. 그렇다 세계 어느나라에도 찾아보기 힘들만큼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서 전반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 (이것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나) 은 높아졌다고 평가가 된다. 그토록 많았던 영아 사망률은 줄어들고, 평균 수명도 훨씬 늘어 환갑을 넘어도 아직 한창으로 보는 사회분위기이다. 이제 보릿고개라는 말도 없어지고 누구나 언제든 의지만 있다면 아르바이트라도 일을 해서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회사 2곳이 한국회사이고, 한국에서 만든 K-pop 이라는 장르와 아이돌 스타들은 월드스타로서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를 정도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렇게만 놓고보면 헬조선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의 말은 노력하며 살지 않는 루저들의 괜한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기하고 연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라다크에서 라디오 방송이 나오는 요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직접 할 필요가 없어졌다. p.231
그러나 라다크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발이라는 국가차원의 거대한 논리에 밀려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1위의 나라이다. 자살율 1위, 남녀간 임금격차 1위, 유아 교통사망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산업재해사망율 1위 ... 끝도 없다. 자살율의 경우는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민족에 비해 유전적으로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일까? 민족성과 문화적으로 우울증에 약한 나라일까? 그럴리는 만무 할 것이다. 경제발전의 논리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무지와 질병과 끝없는 노역이 미개발 사회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또한 개발도상국 사회에 나타나는 빈곤과 질병과 굶주림은 그러한 가정이 입증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오늘날 제3세계 국가가 겪고 있는 많은 사회문제들은 주로 식민주의와 잘못된 개발의 결과물이다. p.41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우리가 외면해 왔던 것이 무엇이었을지를 자신의 16년 라다크 삶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통해 설득력있게 주장을 해오고 있다. 하나의 단어를 뽑자면 '인습적 개발' 이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서구적인 방식의 개발, 산업화, 발전, 진보 등은 적용되는 지역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으로 진행되어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밭을 가는데도 쓰이고 젓을 얻는데도 유용한 그 지역의 '쪼' 라고 하는 소와 닮은 동물에 대해 서구인들은 미련하다며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젓소를 키우면 매일 젓을 30L 씩 얻을 수 있는데, 쪼는 3L 밖에 못얻는다. 바꾸는게 발전에 좋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서구인들은 라다크라는 곳에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책상앞에 앉아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소는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그 고원지대에서 살수도 없을 뿐더러 쪼 처럼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알아서 풀을 뜯어 먹지도 못해 사료를 매일 가져다 바쳐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발전과 개발을 이야기할 때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서구 우월주의에 입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의 유용성을 깨닫지 못한 무지의 결과가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런 내용의 사례 중 단지 웃기만 할 수 없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외국 관광객들은 등에 짐을 지고 높은 산을 넘어 먼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말 끔찍하군! 얼마나 고생스러운 인생일까?”
그들은 자기들이 수천 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했고 무거운 짐을 지고 라다크 사람들이 오르던 바로 그 산을 올라가는 기쁨을 위해 수천 달러를 지불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p.189
수년 전 나와 가족은 남태평양에 있는 피지라는 곳에 봉사활동을 다녀온적이 있다. 검은 피부를 한 원주민들은 언제나 '불라~' 라며 환하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그곳에서 넉달 정도를 지내면서 특이했던 점중 하나가 그들이 신발을 잘 신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가까운 거리에서는 맨발로 다닐때가 많았다. 한번은 친해진 원주민 한명의 발을 보는데 깜짝 놀랐었다. 그들의 발바닥의 두께는 N사의 신발 밑창보다 더 두껍고 탄력이 있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졸이 따로 없었다. 맨발로 늘 다니고 정글속에 들어갈 때도 맨발로 거친 바닥을 밟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인지 곱게 신발로 감싸고 있는 나의 발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런 그들 문화에 이제는 신발이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신고 다닌다. 과연 그들의 10년 후 혹은 20년 후의 발바닥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자가 발전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헬레나가 이야기하는 것은 발전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된 미래' 라는 책의 독자는 이제 갓 발전을 해가는 과정에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아니라, 이미 도시화, 산업화를 이룬 발전된 나라의 시민들일 것이다. 즉, 아직 발전과 개발의 맛도 보지 못한 나라에게 감놔라 배놔라 하면서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개발된 국가의 방향이 과연 이대로 가도 좋은가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사회의 모토가 되어버린 ‘우리는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라는 말이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고 해도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미래를 추구하는 우리의 노력은 우리 자신을 필연적으로 자연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근원적인 패턴으로 되돌려놓고 있다. p.336
이것은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중심화를 이룬 고도의 대규모 사업만이 발전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한다. 그것은 골목빵집과 거대 프랜차이즈 빵집과의 구도를 바라보면서도 발생하고, 레고랜드가 들어오기로 한 땅에 고대 유적지가 발견되는 곳에서도 드러난다. 도서정가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우리는 그 '고정관념' 에 입각해 보고 있지 않을까도 생각이 든다. 한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처럼 '무엇이 중헌디!' 의 문제가 아닐까?
저자 헬레나는 그래서 '탈중심화'를 주장한다. 제발 평균에 맞추지 말자는 말이다. 초등학교 교실의 의자와 책상을 아이들 평균에 맞춰 똑같은 크기로 제작을 해서 앉도록 하지 말자는 것이다. 저마다 자신마다의 특성과 키, 몸무게, 재료에 대한 알러지 반응 등이 다 다를 수 있으니, 그 아이에 맞는 형태의 발전과 개발을 하자는 것이다.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하게 되면 더 저렴하고 대량으로 만들 수 있으나 지역별 특성에 맞추기 위해서는 중앙 통제와 현재 서구적 경제 시스템에서는 대응이 어렵다. 거대한 발전소는 만들 수 있으나 마을 공동체가 쓰고 관리할 그 지역의 물레방아 프로젝트는 진행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라다크의 도시 '레'에서 그간 벌어진 변화를 보면서 발전의 방향이 단순히 자본 편중의 문제로 가도록 내버려두는 그런 개발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해서 의문을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한다. 그것은 단지 라다크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이곳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학교 후문쪽 지하철역에 내려 후문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서 '히치하이킹' 이라는 것을 했다. 거리에서 엄지손가락을 '좋아요' 표시처럼 들고 길을 향해 쭉 뻗으면 지나가는 차가 서면서 학교까지 태워주는 그런 문화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곳을 지나며 재미삼아 엄지손가락을 뻗어보지만 아무도 차를 세워주지 않는다. 나같아도 세워주기가 꺼려질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때는 가능했던 것이 지금은 힘들게 된 세상이 된 것이다. 학교 내부에 유명 프렌차이즈 커피숍과 식당이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단지 700원짜리 학생회관 식당의 밥을 사주는 선배들에게 고마와 했던 시절이 떠올라 씁쓸함이 더해졌다. 대학을 다녀도 돈이 있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마치 산업화되고 소득수준이 많이 올라서 살기좋아졌다고 하는 우리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쓸쓸히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독거노인들이 있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게 보였다. 어쩌면 그 옛날 '맹골'에서 '거지네'와 함께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 꿈이나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요즘이다.
이런 때에 오래된 미래는 우리가 익숙함에 젖어 있는 지금으로 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생각 전환의 도구로서 가치있는 책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오는 웃고 있던 수많은 라다크 사람들의 사진 중 하나를 가져와 보았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웃음이 가득하길 기대하면서...
김성민의 북리지 - 함께 성장하는 책 리더십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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