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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의 독서경영] 다른방식으로 보기 - 존 버거

[김성민의 독서경영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p.10


 방금전에 강남의 부동산이라면서 전화가 왔다. 수익이 될만한 아주 좋은 정보가 있다면서..  

 그런 좋은 정보가 있다면 자신이 투자하면 될 걸 이렇게 다른 사람의 부를 불려주기 위해 애를 쓰시다니,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천사나 다름이 없다. 노벨 평화상을 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사기꾼일 것이다. 

 사기를 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만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기꾼이 좋아하는 아주 전형적인 타입이다. 사기란 확신이란 틈을 타고 벌어지는 고도의 심리게임이자 예술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직접 경험하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 책 첫머리에 있는 말과 같이 우리는 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바대로 본다. 직장에서 부하직원이 지각을 했을 때 평소에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던 상사라면 그의 지각은 어떤 피치못할 상황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애석한 사건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나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문제사원이라고 믿고 있던 상사에게 그의 5분 지각은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하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신시키는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매일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도 모두 신의 섭리와 은총으로 보여지고, 무신론자에게는 우연히 발생한 재수로 보일 뿐이다. 같은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미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이처럼 다른데 미술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하느냐며 Ways of seeing(바라보는 다양한 방식들)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현대 미술에 대한 해석이 오직 가진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책의 첫머리에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글에는 일본의 하이쿠 하나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자들을 위해

새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왜 그토록 옛날 그림들에는 누드화가 많을까 의문이 들었다. 기존의 방식으로 바라보던 대표적인 평론가는 누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케네스 클라크는 자신의 책 ‘누드’에서 벌거벗은몸(naked)은 그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인 반면, 누드(nude)는 ‘예술의 한 형식’ 이라고 주장한다.  p.63

그러나 존 버거는 다르게 바라본다. 어느 순간 예술작품으로 그려진 누드는 외설스러운것이 아니라 그냥 작품이고 예술이라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남성 관람객에게 외설과 거의 비슷한 작용을 하는데도 말이다. 미술 그림속의 누드로 있는 여성 모델은 평소에는 거의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자세로 작품을 보고 있는 관객인 남성을 향해 어필을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존 버거는 벌거벗음(naked)와 누드(nude)의 차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벌거벗은 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드는 벌거벗은 상태로 타인에게 보여진다 하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p.64


그리고 미술에서 이런 누드는 철저히 성차별적인 관점으로 제작되고 판매되고 비평되어 왔음을 이야기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작품이나 하나 고른다음, 그림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p.76


지금까지 미술 교과서에서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미술작품이라고 하니 나도 그 신념을 그대로 답습한채 미술을 보아왔다. 물론 신념과 믿음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일테니 어느정도 교육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특정 계층, 즉 부자, 상류사회, 갑, 재벌 등을 변호하는 관점만을 채우고 있었다면 한번 다시 생각할 문제이다. 

이 책에서 존 버거는 'Ways' 라며 '보는 방법'에 대해 복수형을 사용한 이유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여러 방법이 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꼭 미술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다양하게 볼 수 있고, 그렇게 다르게 보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문화가 성숙된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제목만 보고 관점에 대한 책인줄 알았다가 미술 관련책인 줄 알고 깜짝 놀랬고, 읽고 나서 보니 미술 이야기였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 놀라왔다. 새로운 시각을 갖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 속의 명언>


  • ‘더렵혀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려면 그 땅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p.127
    ; 곡식이 자라는 멋진 대지를 배경으로 그려진 귀족의 모습은 순수한 자연속의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 땅을 소유한 지주의 모습임을 밝혀내고 있다. 

  • 광고에 미술 작품을 ‘인용’ 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즉, 미술은 풍요의 상징이며 훌륭한 생활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p.156
    ; 흔히 예술 마케팅이라고 해서 기업들이 미술이나 음악등을 이용한 상품 홍보 전략을 보이는데, 미술 자체가 브랜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p.161
    ; 유화는 소유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존재이다. 쉽게 가질 수 없고, 한정판이기도 하다. 

  •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p.169
    ; 판타지를 줄 수 있는 광고, 그래서 소비하게 끔 만드는 광고. 그것이 광고의 진실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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